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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1960년대의 급진주의자들

By 김태오 목사 – 설립자 & 공동대표

11-26-18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60년대에 일어난 미국의 혁명은 이전의 모든 풍습, 전통, 이상 그리고 정치까지 모두 바꾸려고 추진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60년대의 급진주의자(radicals)들은 이제 나이를 먹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기득권층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때의 혁명이 별다른 영향도 없이 1970년대 초에는 수그러들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다시 돌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침묵의 다수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지 모르지만, 그 때의 혁명은 승리했습니다. 반세기 후인 지금 세상은 훨씬 더 1968년과 비슷해 보입니다.

격동의 60년대 당시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문화적 의제(agenda)) 들은 – 그것이 진보적이든, 퇴보적이든 – 이미 제도화된 지 오래입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군대 징병 모집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에는 투명성이 더 높아졌고, 한때 따돌림을 당하거나 무시하듯이 ‘모자라다’ 라고 불리웠던 장애아들이 이제는 사회에 훨씬 더 잘 녹아들고 특별한 필요가 있는 아동으로 더 윤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여성, 소수민족들의 권리가 향상되고, 이제는 심지어,  1973년까지만 해도 American Psychology Association ( APA- 미국 정신과) 에 의해 “정신질환, 정신이상, 비정상적 성행위” 로 취급되던  동성애자들의 결혼까지 정상적으로 합법화되며 LGBT 공동체의 권리는 현재 시민들의 권리보다 훨씬 더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양식에는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로지 좋은 쪽으로만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예로, 60년대 후반 이전까지 지금시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이를 갖기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다 있는 가운데 자란 아이들이 single parents 의 보호가운데서 자란 아이들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더 적은 통계나, 지금의 청소년 자살 통계를 보면 확연히 이전이 좋았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변화 중, 그 변화가 물려준 다른 유산에는 늦게 결혼하는 커플과 아이를 적게 갖는 것이 포함됩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러한 사회적 유산은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성숙의 시기가 점점 늦어지는 “청소년과 청년기의 연장”, 나이든 부모, 지연되거나 사라진 주택 소유물을 의미하며, 특별히 큰 도시들 안에서는 집안일보다는 여가 시간에 더 중점을 두는 것들이 있다고   Daily Signal 은 보고하고 있습니다.

패션에 있어서도 여전히 60년대 유행은 좀 남아있지만 이전처럼 복장 규정이란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억만장자들도 이제 상의와 함께 있는 바지나 정장 신발보다는 청바지, 티셔츠, 운동화를 신고 다닙니다. 1950년대의 가는 철사 테 안경은 노인들의 안경으로 여겨졌는데, 어느새 유행이 되더니 지금은 표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60년대의 상징적인 마약인 마리화나는 이제 많은 주에서 의학적 용도나 오락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합법화되었고, 곧 멀지 않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마리화나 구입은 더 이상 위법이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참고로, 지금 점점 합법화 되는 추세의 오락용 마리화나는 60년대 사람들이 소유했던 마리화나보다 훨씬 해로운 요소들이 많이 들어있기에, 이미 오락용 마리화나를 통과시킨 주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늘어난  차 사고, 정신혼란상태에서의 자살, 총기사건들 케이스만 봐도 오락용 마리화나 사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락용 마리화나”는 우리 자녀들과 다음세대에 치명적인 위험한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 드라마에도 큰 변화가 있습니다.

60년대 이후 영화에는 1950년대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일종의 세속적인 표현, 나체, 그리고 폭력적인 표현 등이 일상적으로 포함되게 됩니다. 영화에서의 로맨스는 종종 더 이상 건전한 교제, 낭만, 신비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화면상에서 범람하는 섹스로 바뀌었습니다.

60년대에는 난잡함과 일회성 만남이 마치 “정상” 인 것처럼 새롭게 남녀관계를 재정립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그 여파로 인해 마치 그것이 “진리” 인양 모든 사회문화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그에 따르는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피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문화형성을 이룬 60년데  극(radical )자유진보운동가들은 이런 현상들까지 예상해서 남녀관계를 재정립 시킨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60년대 후반에 있었던 캠퍼스 소요 전에, 대학 커리큘럼에는 “study courses” 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60년대에만 해도 대학이라는 곳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사상들 즉, 철학과 문학, 언어, 과학, 수학, 그리고 전문성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곳이었고, 그것과 더불어 사물의 이해를 위해 귀납적인(inductive) 사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을성 없는 60년대 세대는 그러한 사상들 이야말로 별나고, 순진하며,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장애물로 여기면서 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대학은 연역적(deductive) 진보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최신 학습 과정들은 이제 학생들이 실증적(empirically)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정치적 정당성(politically correctly)에 의거하여 생각하도록 훈련시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아이들이 공립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창의력 있게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돕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로 하여금 “정치적 정당성” 이라는 박스안에서만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정당화시켜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 되어져야 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고정관념에 다시 끼어 마주는 그야말로, 공산주의처럼 무서운 “사상, 이념 주입식 교육소” 가 되어 버렸다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물론, 지금 새로운 트럼프 정부로 인해 교육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 외에도,  60년대의 다른 여러 위험한 생각들은 지금까지  남아있고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캠퍼스안에서 지금까지 존중되어오던 개인의 다른  ‘표현의 자유’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캠퍼스마다 “표현의 자유 구역” 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외치는 것만 허락되어 있는 상황인데,  결국, 그 구역에서 외침조차 자신들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대는 곳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특별히,  캐버너 대법원 인사청문회때 있었던 일들은 이 시대에 공립학교 및 대학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에 대한 조명을 잘해줍니다.

캐버너가 생명의 존엄성을 고수하고 미국헌법을 헌법 자체로만 해석하는 헌법주의자 겸 보수주의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대법관 인사청문회는 법원안에서는 민주당 진보정치인들에 의해 엄청난 인격모독과 근거 없는 의심, 그리고 모함의 고통스러운 장소었고, 길거리에서는 캐버너 판사를 막고자 하는  자칭 “인권 운동가” 들의 익살극, Antifa의 폭력, Black Lives Matter (BLM)  운동권들의 폭력과 방해 하는 모습은 모두 60년대에 시작된 ‘고귀한 결과를 얻기 위한 정당한 수단들’ 이란 행동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인권운동가들이 실제로는 극진보주의 “큰 손” 들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있는 검증된 사실입니다. 

인권의 진보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추구했었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개인 성품의 내용을 강조하며 피부색과 상관없는 사회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주의’ 적인 인권진보를 위해 싸웠던 것인데,  지금의 “인권진보”는 “인종 차별”의  의미를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만연한 정체성 정치들로 바꿔버렸습니다.

빌 클린턴과 트럼프 대통령의 자유분방한 습관은 60년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알 고어와 버락 오바마의 강경한 좌파적 연설과 끊임없는 허세도 마찬가지로 60년대에서 비롯됬습니다.   젊은세대에게 인기있는 Alexandria Ocasio-Cortez의 새로운 유행성 사회주의라는 것도 이미  1968년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낡은 사회주의에 불과합니다.     

또한, 지난 8년간 오바마 전 행정부에 의해 역사 교과서의 내용까지 바뀌어 새로운 역사를 배운 우리 자녀들에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가 나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롭고 새롭게 추진해  볼 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정부의 모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에 학부모들과 어른들은 올바른 역사와 자녀교육에 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60년대의 좋은 점들이 아무런 나쁜 영향들 없이 지금에까지 이르렀을 수 있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60년대의 아픈 상처들은 1968년 세대가 나이가 들었음에도 치유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제 미국인들은 점점 자신이 어디에서 살 것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을 하는 추세입니다. 더 깊은 종교 생활, 더 작은 정부, 더 적은 세금, 더 많은 자유를 선호하는 사람들 즉,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계속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시골 적이고 공화당 성향의 주들로 모여드는 경향이  새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민주당 성향의 해안 쪽 주들에 사는 사람들은 60년대의 정신인 유행을 앞서가는 도시 문화, 더 큰 정부, 더 높은 세금, 정체성 정치에 더 큰 중점을 두는 것 등의 정신을 고수하면서, 미국의 급진적  변화, 즉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 을 따르고 이루어 나가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60년대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공화당은 그들이 1968년 이후 더 많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침묵하는 다수가 결국 여전히 전통적인 미국이 가능하도록 구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60년대의 Bill Ayers, Jane Fonda같은 급진주의자들은 결코 널리 인기를 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TV를 켜고, 영화나 NFL 게임을 보고, 대중 음악을 듣고,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옷을 입고 다니며 말하는지를 보고, 주요 도시를 걸으며, 유명인사들과 정치계쪽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도 당신은 결국 급진적인60년대 세대가 승리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은 미국의 지금 세대의 모습이 결코 우연히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온 급진적 진보주의(Radical progressivism) 사상은 이 미국 땅에 수많은 피해와 사상자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정치, 교육, 경제, 문화, 산업, 복지 등 사회 전반에 걸친 60년대 사상 변화의 영향력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전까지 보수적이며, 전통적이고 성경적이었던 사람들의 가치관은 순식간에 앞서 열거한 것들과 반대쪽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더 나아졌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 라는 대답보다는 ‘그렇지 않다’ 라는 대답이 어울리는 것은 무너져 버린 도덕심, 무시되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 혼란스러운 결혼에 대한 정의와 쏟아지는 비 인륜적이고 비 성경적인 법안들 만으로도 다 설명이 되지 않는 미국의 현실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지난 50년 간 아무런 변화없이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그대로 있었어야 만했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필요하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는 변화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과 목표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변화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가 철저하게 불완전한 인간 중심이라면 그 결말은 불을 보듯 명확합니다.

그 와중에, 미국의 기준점 같았던 교회의 사회 변화에 대한 무관심, 무대응의 자세도 지금의 미국을 있게 만든 주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가 외치는 진리는 오직 ‘성경’ 이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전하는 방법에 대하여 연구를 게을리하고, 그리고 젊은 세대들의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겪는 고민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교회와 더불어 미국에 사는 많은사람들이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별력은 모든 지혜에 뛰어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경은 그 분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에 미국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사라진 성경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회복되는 것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앞장서서 뛰는 선두주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격동의 1960대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유산은 바로 ‘성경적 세계관’ 입니다.  지식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전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삶에서부터 비롯되는 ‘성경적 세계관’ 으로 새로운 반세기를 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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